옥포대첩기념공원

옥포대첩 개요와 의의

거제관광개발공사 2013. 11. 22. 15:18

옥포대첩의 개요

 

  옥포대첩은 무방비 상태의 조선이 일본의 수군을 맞아 벌인 최초의 전투이자 승전이다. 옥포만은 지형이 복잡한 거제도의 동쪽에 위치한 소규모 어항으로 임진왜란 이후 ‘구국의 고장’으로 자리매김됐다. 당시 이순신을 위시한 우리 수군이 옥포에서 큰 승리를 거둔 것은 장비나 실전 경험의 우수성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다.

 

사진은 옥포대첩기념공원에 있는 참배단

 

 

  조정은 왜구에 대한 방비를 전혀 세우지 못한 채 당파싸움으로 혼란스러웠으며, 무기 또한 왜구의 조총에 대적할 만한 것이 조선에는 없었다.

  그러나 우리 수군은 어려운 상황임에도 "나라를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애국애족의 충무정신으로 일치단결하여 전투에 임하였던 것이다.

  특히 옥포대첩은 왜군의 통신 및 보급로를 차단해 왜군의 육상전진을 저지했으며, 아군의 사기진작에도 기여한 바가 크다.

 

 

옥포대첩의 의의

 

 임진년 4월 14일 부산포에 침입한 왜적은 상주, 충주를 거쳐 5월2일에는 마침내 서울을 점거하고, 6월13일에 평양에 이르면서 전국 곳곳에서 살인과 방화와 약탈을 자행하고 있었다. 이때 경상우수사 원균(元均)이 율포(栗捕) 만호 이영남을 전라좌수사 이순신에게 보내어 구원을 요청하였다.

4월29일 구원요청을 받은 이순신 장군은 전라좌도는 경상도와 더불어 일해상접(一海相接)한 요새(要塞)라는 명석한 판단으로 출전을 결단, 5월4일 축시(丑時)에 판옥선(板屋船)24척, 협선(挾船)15척, 포작선(鮑作船)46척을 거느리고 전라좌수영을 출발 경상도로 향했다.

 

 

 

 

  비포(所非浦) 앞바다에 이르러 날이 저물어 하룻밤을 지낸 다음 5월5일 새벽 전 함대를 지휘하여 원균과 만나기로 약속한 당포(唐捕)로 향했다. 5일 밤을 당포 앞바다에서 보내고 6일 아침에야 전선 1척을 타고 도착한 원균을 만나 왜적의 정세를 상세히 듣고 남해 현령과 경상도의 진장(鎭將)들의 전선 6척을 증강편성하고 거제도 남단을 거쳐 송미포(松未浦) 앞바다에 이르러 밤을 지냈다.

 

 

 

  7일 새벽에는 일제히 송미포를 출발 왜적이 머무르고 있는 천성(天城), 가덕도(加德島)로 향했다. 오시(午時) 경, 이윽고 이들 91척의 함대가 옥포 앞바다에 이르렀을 때, 이순신 장군이 타고 있던 판옥선상에 전방의 척후선(斥候船)으로부터 옥포선창에 적선이 있음을 알리는 신기전(神機箭)이 날아들었다. 이순신 장군은 여러 장병들에게 적선의 발견을 알림과 동시에 전열을 가다듬고 준엄한 목소리로 "가볍게 움직이지 말라. 태산같이 침착하게 행동하라"는 주의와 함께 공격개시의 군령을 내렸다. 이 같은 맹렬한 공격으로 옥포선창에 정박하고 있던 적선50여 척 중 30여 척이 격파되니 한창 강성(强盛)하던 적의 기세가 한순간에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바로 이것이 옥포대첩이요, 구국의 대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