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제 이야기

저도의 마지막 주민 윤연순 할머니

거제관광개발공사 2019. 12. 3. 16:22




윤연순 할머니의 하루 일과는 저도를 보는 것으로 시작하여, 저도에서 일을 하고, 저도를 바라보면서 마무리 한다. 아침에 일어나 문을 열면 저도가 보이고, 지금도 평일에는 매일 저도에 출근하여 일을 하고, 배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면 낙조에 아름답게 물든 저도의 손을 놓으며 내일을 기약한다.

윤 할머니에게 저도는 자신의 인생이 고스란히 투영된 삶의 전부라고해도 과언이 아니다. 평생을 저도에 의지해 살았고, 앞으로도 살아갈 삶의 터전이다. 지금도 윤 할머니는 저도 얘기라면 몇 날 며칠해도 지겹지 않다고 말한다. 섬 곳곳에 배인 지난날의 추억과 향수, 억척스레 살아온 삶의 족적들이 훈장처럼 숨 쉬고 있기 때문이다. 무던히도 힘든 세월을 넘어왔고, 환하게 웃음꽃 피운 젊은 날의 곱디고운 얼굴을 생각하면 자신의 대견스러움에 콧잔등이 시큰해지고 눈시울이 촉촉해진다.

윤 할머니는 거제시 하청면 유계리 동리마을이 고향이다. 그렇게 넉넉한 살림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배를 곪을 정도도 아니었다. 아버지의 귀염을 넘치도록 받으며 사랑이 넘치는 유복한 집안에서 자랐다.

스무 살이 되던 해 집안에 잘 아시는 할머니가 중매를 놓았다. 친정아버지와 시아버지 모두 서로 너무 잘 알고 친한 사이여서 혼사는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친정에서 커면서 딱히 험한 일을 해본 적이 없는 윤 할머니의 시집살이는 만만치 않았다. 그래도 뭐 하나 제대로 알줄 아는 것이 없는 며느리를 시아버지는 예쁘게 봐 주셨다.

결혼 할 당시 남편은 군인이었다. 하사관일 때는 제주도에도 근무했고, 중사로 진급하고 나서는 부산 광안리에서 군대생활을 이어가다 만기 제대를 했다. 남편의 첫 직업은 부산 자갈치에서 통통배에 사용하는 기름 장사였다. 믿을 것이라고는 건강한 몸뚱이 하나였다. 무작정 부닥치며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기름을 팔기 위해 하루 종일 부둣가를 헤매고 다녀야 겨우 입에 풀칠할 수가 있을 정도였다. 열심히 일을 해도 살림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자식이 둘이 생기면서 입은 늘어 가는데 벌이가 신통치 않다보니 고단한 하루의 연속이었다. 그 당시 윤 할머니는 시아버지가 분가를 허락하지 않아 유호리에서 큰딸과 둘째딸을 낳았다.

남편은 궁리 끝에 귀향을 결심했다. 도회지서 뼈 빠지게 고생하는 것보다 고향에서 마음 편히 오순도순 살고 싶었고, 마침 저도에 큰 시숙어른이 계셨는데 자기만 부지런하면 얼마든지 먹고 살 수 있다는 말에 시댁 유호리에서 손에 닿을 듯 맞은편에 있는 저도에서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다.

할머니는 할아버지와 저도에 들어간 연도를 정확하게 기억하고 계시지는 않고 있다. 딸 둘을 유호리에서 낳아 업고 저도에 들어갔다고 기억하시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1960년대 초반으로 추정되고 있다.

당시 저도에는 멍게, , 홍합, 미역, 고동 등 해산물이 지천으로 깔려 있었다. 톳 나물은 하도 많아 할머니 혼자 잠깐 베도 짚으로 엮은 가마니에 3가마니는 너끈해 수입이 쏠쏠했다고 한다.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수확한 해산물을 집에 있는 자그마한 통통배에 싣고 가든지, 도선에 옮겨 실어 마산에 가져가서 팔아 생활비를 마련했고 조금씩 저축도 할 수 있었다.

그 시절 큰 시숙어른, 시아버지와 함께 논 11마지기와 밭농사 일부, 그리고 해녀사업, 해산물 채취 등을 하면서 살았다. 논농사라고 해봐야 비가 제때 내려줘야 농사를 지을 수 있는 천수답이라 넉넉한 수확을 장담할 수는 없었다. 그것도 내 것, 너 것 구분도 없어 수확이 많아도 윤 할머니에게 몫이 많이 돌아오는 경우는 없었다. 그냥 큰 시숙어른이 적으면 적은대로, 많으면 많은 대로 나눠주는 만큼이 윤 할머니의 몫이었다. 그때는 몸만 건강하고 굶지만 않으면 된다는 생각이 전부였던 시절이라 몫이 적은 것에 대한 불만은 생각할 수도, 실제로 불만을 가진 적도 없이 집안 모두가 화목하게 살았다.

 


그러던 어느 때쯤-아마도 1970년대 초반-(윤 할머니는 정확한 연도를 기억하지 못하고 계신다) 저도가 대통령별장 청해대로 지정되면서 본격적으로 별장 조성공사가 진행되었다. 할머니 기억으로는 세 차례 나눠 공사가 진행됐다고 한다.

청해대로 지정된 후 박정희 대통령이 가족과 함께 저도 별장에 들러 곤 했다. 그런 어느 해 7월쯤 박 대통령이 저도에 오셨는데 마침 그때 저도가 3년째 가뭄이 들어 논에 심어 놓은 벼가 누렇게 변할 정도로 말라 농사를 망친 적이 있었다. 본래 저도는 우물이 13개나 있을 정도로 섬치고는 물이 풍부한 편인데도 오랜 가뭄에는 속수무책이었다. 이 광경을 박 대통령이 보고 벼가 왜 저렇게 되었냐고 물었다. 큰 시숙어른과 시아버지가 천수답이라 비가 오지 않으면 농사를 못 짓는데 최근 3년 동안 가물이 들어 저렇게 되었다고 말씀을 드렸다고 한다.

그 이야기를 하고 얼마 안 있어 보안대에서 시아버지를 찾아 왔길 래 처음에는 우리가 무슨 죄를 지은 줄 알고 가슴이 두 근 반 세근 반이었다고 한다. 이후에 알게 된 것이지만 아마도 박 대통령이 우리들의 딱한 사정을 알고 생계대책을 마련하여 지원하라는 지시가 떨어진 것으로 보였다. 마침 별장 조성 공사로 논밭이 잠식되고 있던 터라 섬을 지키며 살고 있는 주민들을 배려한 고마운 조치였다.

그 후 저도를 관할하고 있는 해군에서 살림에 보태라며 젖소를 키우라고 줬다. 해군에서 젖소를 키우라고 준 것은 섬에 질이 좋은 풀이 많은 것을 알고 그 풀이면 젖소를 키울 수 있을 것이라 짐작하여 입식을 시켰다. 하지만 당시에는 젖소는 너무도 생소한 가축이었고, 젖소 관리와 젖을 짜고 파는 판로가 되어 있지 않아 키울 수가 없었다. 결국 젖소 사육은 실패로 돌아가자 이번에는 검은 소 10마리를 섬에다 풀어 놓았다. 육우였다. 육우는 젖소보다 더 문제가 심각했다.

윤 할머니 말씀이 검은 소를 섬에 방목을 했는데 이 소는 바보멍청이인지 지 죽는 줄도 모르고 계속 죽어 나자빠지는 기라. 등신 같은 것이 절벽에 떨어져 죽고, 물에 빠져 죽고... 아무리 짐승이지만 지 죽을 짓을 골라서 하는데 방법이 없어

검은 소도 사육에 실패하자 이번에는 한우 중소 10마리를 입식시켜 줘 한우는 아무 탈 없이 잘 키울 수 있었다.

 

별장 공사가 진행되고 나중에는 골프장 공사까지 이어지면서 할머니 댁 살림살이도 조금씩 허리를 펴기 시작했다. 할머니는 공사 인부들 밥해주고, 할아버지는 바닷일을 열심히 하여 모은 돈으로 지금의 유호리 집도 사고, 자식들을 공부시켰다.

윤 할머니는 유호리에서 자식 둘을 낳고 저도에 들어가서 다섯을 낳았는데 작은 섬이다 보니 자식들 교육시키는 것이 녹녹하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큰딸은 하청 외갓집에서 학교를 다녔고, 다른 아이들은 부산에 이모가 있어서 유학을 보내 학업을 잘 마칠 수 있었다.

 

윤 할머니가 팔십 넘는 생을 살면서 유일하게 욕을 퍼부은 데가 있다. 바로 삼신할매다. 할머니는 7남매를 거느렸다. 그 중에 딸이 여섯이고 아들은 겨우 하나를 얻었다. 결혼해서 딸을 하나 낳고, 둘을 낳을 때까지는 크게 걱정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딸을 셋을 낳고, 넷을 낳으면서 슬슬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낳았다 하면 딸이니 남아선호사상이 팽배했던 당시에는 딸만 낳는 것은 죄를 짓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대를 이어야 한다는 책임감에 할머니 스스로 조바심을 낼 수밖에 없었다. 괜스레 시부모님 눈치가 보이고, 마치 죄인이라도 되는 양 기를 못 펴고 저절로 움츠려들었다.

아들 낳는 방법이랍시고 주변 여인네들이 가르쳐주면 귀가 솔깃해졌다. 시부모님이 아들 못 낳는다고 대놓고 말씀하시지는 않았지만 마음고생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윤 할머니의 입에는 절로 삼신할매에 대한 탄식이 쏟아졌다. “자식을 점지해주는 삼신할매는 왜 나에게는 아들을 점지해주지 않고 딸만 줄줄이 점지해 주느냐는 원망했다.

그리고는 삼신할매에 대해 선전보고를 했다. “내 반드시 아들을 낳을 것이다. 딸을 열 명 낳더라고 삼신할매가 아들을 점지해 줄 때까지 자식 낳는 것을 포기하지 않겠다. 삼신할매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한번 해 보자며 마음속으로 절규했다.

삼신할매한테 아들을 점지해 달라고 그렇게 애원하면서 낳았건만 다섯째, 여섯째도 딸을 낳자 할머니는 악에 받쳐 오기가 생기기 시작했다. 주변에서는 하도 딸만 골라 낳자 위로인지, 조롱인지는 모르나 딸 일곱을 낳고 나면 아들을 낳을 수 있을 것이라고 용기를 줬다.

악을 쓰고 용을 쓴 효험이 있었는지 마침내 할머니는 소원풀이를 했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아들이 태어난 것이다. 그 아들이 지금 마흔아홉이다. 할머니는 자랑스러운 아들을 볼 때 마다 자신이 의지의 한국인이라는 것에 자긍심을 느낀다.

 

할머니가 서른일곱(1972) 되던 해 마침내 저도를 떠나야만 했다. 하나 둘씩 다 떠나고 저도에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윤 할머니에게 해군에서 섬에서 나가달라는 통보가 왔다. 저도에서 나가야 된다는 것은 어느 정도 예견돼 있었던 일이었기에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섬을 떠나는 것에 대한 정식적인 보상은 없었다. 생계대책으로 우리에게 준 것은 어업허가권이 주어졌는데 매년 경신하는 조건이었다. 거기에다 보상이라고 말할 수는 없으나 그래도 받은 것이라면 섬에서 키우던 한우 10마리 중 큰집에서 1마리를 윤 할머니에게 줘서 받았을 뿐이다. 당시 정부에서 받은 어업권 중 나잠어업권(해녀)은 윤 할머니 댁이 하고 잠수기어업(머구리)은 큰집에서 하는 것으로 했다. 이마저도 저도 인근에서 간첩선 사건이 터지면서 3년밖에 이 일을 하지 못했다. 그 이후로 저도에 들어 갈 때마다 일일이 허가를 받고 들어가야 될 정도로 통제가 강화되었다.

 

그렇게 저도를 떠나 건너편 유호리에서 자리를 잡고 살고 있지만 저도는 할머니 인생의 현재진행형이다. 지금도 1주일에 5일을 운동 삼아 대통령별장 풀매기 등 일을 하러 들어간다. 저도가 건강도 주고, 소일거리도 주는 고마운 존재로 늘 곁에 있다.

지난 730일에는 저도를 방문한 문재인 대통령 초청으로 저도 개방 기념식수도 하고, 저도를 국민에게 돌려주는 현장을 함께 할 수 있어서 너무 행복했다.

윤연순 할머니와 우리 공사와의 인연도 각별하다. 옥일권 시설관리본부장이 윤 할머니의 다섯째 딸과 결혼한 사위이다.

윤 할머니가 바라는 소망은 자식들 건강하고 잘 살고 있는 것을 보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 할아버지를 떠나보내신지 올해로 11년째다. 언제 할아버지와 해후할지는 모르지만 다시 만나는 그날이 두렵지는 않다.

윤연순 할머니는 회상한다.

우리 영감 참 총명하고 착했어요. 저도를 바라보고 있으면 우리 영감하고 서로 챙겨주며 살갑게 살았던 지난날이 무척 그립다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