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이되고 피가되고

기관총의 위력-옴두르만 전투

거제관광개발공사 2014. 8. 4. 16:58

옴두르만 전투

기관총의 위력

 

맥심 기관총이 남긴 교훈 - 옴두르만 전투중동

 

  기관총은 여러 면에서 인류의 역사를 바꿔놓은 발명품으로 인정받는다. 비단 전쟁의 역사뿐이 아니다. 기관총과 더불어 수탈의 역사, 야만의 역사, 학살의 역사, 식민 제국주의의 역사가 활짝 펼쳐지게 되었다.

화약과 총알을 총구 앞쪽에서 집어넣고 열심히 쑤시던 전장식 소총방식에서 좀 더 간편하지만 여전히 비슷한 메카니즘으로 동작하던 후장식 소총이 개발되었지만 보병들의 최고의 미덕은 변함없이 원샷 원킬에 돌격 앞으로였다. 전장식보다 후장식이 편하긴 하지만 이 정도는 전장에서 승패를 가름 짓는 큰 차이로 작용하지 못했다.

 

맥심 기관총

  하지만 분당 6백발이 넘는 총탄을 미친 듯 쏟아 붓는 기관총이 전선에 등장하면서 전투의 양상은 변화되었다. 개돌의 미덕은 사라지고 방어선 너머 참호 속에 웅크리는 참호전이 시작되었다. 무턱대고 적의 안마당으로 질럿러시 가기에는 기관총의 살상력은 상상을 초월했기 때문이다. 기관총은 수적 열세를 만회하고 적의 사기를 꺾는 무시무시한 발명품이었다. 이 땅의 동학교도들이 수적 우세에도 우금치 고개를 넘어 한양으로 진격하지 못한 것도 따지고 보면 일본군, 관군 부대가 가지고 있던 꼴랑 몇 정의 기관총 때문이었다.

 

  기관총중 가장 유명한 모델은 맥심 기관총이다. 하이람 맥심(Hiram Maxim)이 개발한 이 총은 방아쇠만 당기면 드르륵 나가는 완전 자동화된 방식에 1세대 개틀링 기관총에 비해 경량화되서 상대적으로 이동이 용이했다. 사람들은 열광했고 너도나도 이 총으로 무장했다. 탱크가 출현하기 이전까지 맥심은 군바리들의 머스트 해브 아이템으로 자리하게 된 것이다.

 

 1881년 개발이후 여러 변형품과 업그레이드 모델을 파생시킨 맥심 기관총은 개발자의 이름을 따서 Maxim이란 별칭으로 불렸다. 한데 이 Maxim 이라는 단어는 21세기 대한민국 커피의 대명사기도 하지만, <격언> <금언>의 뜻을 가진 영어단어이기도 하다. 격언, 금언이란 뭔가? 삶에 본보기가 될 만한 귀중한 내용을 담고 있는 짤막한 어구라는 뜻이다. 즉, 맥심 기관총은 이름 자체로서 그리고 성능 그 자체로서 적들에게 개기지 말라는 강력한 메세지를 전달하는 무기였다. 그런 이름이 붙은 건 우연이었을까 필연이었을까?

 

 맥심은 "쓸어버린다"의 사전적 의미를 재 정립했고 기관총은 커녕 소총 복제조차 버겁던 식민지 국가들에겐 죽었다 깨어나도 따라갈 수 없는 심각한 전력차를 안겨줬다. 개틀링 기관총에 이어 사용자 편의성을 증대한 맥심 기관총으로 무장한 일본, 러시아, 영국, 독일 등등 제국주의 일진들은 아시아와 아프리카, 미주에 널린 미개한 야만인들에게 그들의 귀중한 격언을 총탄에 실어 퍼부었다. 녹두장군 전봉준도 그 무자비한 격언을 몸소 느껴야 했던 장본인 중 하나였다. 맥심때문에 녹두꽃은 떨어졌고 청포장수는 울어야 했다.

    

영국군이 사용했던 맥심기관총 

 맥심의 등장으로 비로소 대량 살상의 가능성은 활짝 열렸다. 원샷 원킬을 위해 좋든 싫든 표적을 겨냥해야 했던 당시 군바리들에게 가늠자를 통해 보는 적군은 최소한 사람이고 인격체였다. 방아쇠를 당기는 작은 신체의 움직임과 피를 튀기며 쓰러지는 적군간에는 작으나마 죄책감의 상관관계가 존재했다. 자신이 대의를 위해 싸우지만 사람을 죽이고 있다는 인식만큼은 존재했던 셈이다. 자신이 쏜 총알을 맞고 무너져내리는 또 다른 인격체의 모습을 지켜볼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위 사진에서 땅 바닥 가득 탄피를 쏟아내며 기관총의 성능을 뽐내고 있는 맥심 할아버지는 전쟁의 양상만 바꾼 게 아니다. 병사들이 이렇게 어쩔 수 없이 짊어지고 가야했던 살인의 죄책감을 한 방에 날려버렸다. 한 사람 한 사람 정확히 조준할 필요도, 그 사람이 쓰러지는 모습도 더 이상 확인할 필요가 없었다. 단지 조준하고 방아쇠만 당기면 됐다. 가늠쇠 너머로 몰려오는 적군은 더이상 인격체가 아니였다. 그저 저그였고 테란이었고 프로토스였다.

 

 맥심 할아버지가 이 기관총으로 인류에게 안겨준 최고의 전과는 1898년 아프리카 수단에서 있었던 옴두르만(Omdurman) 전투였다. 젊은 시절의 윈스턴 처칠도 참전했던 이 전투에서 25,000명의 영국 혼성군과 수단의 이슬람 전사 52,000명이 대 격돌을 벌였다. 수단을 삼키려던 영국 제국군, 신앙의 힘으로 침략자를 물리치려던 수단군, 그 결과는?

 

 영국군 47명 사망, 수단군 10,000명 사망...헐...당시 증언에 따르면 수단군 사망자의 75% 가량이 맥심 기관총에 희생된 것으로 추정된다. 맥심 할아버지가 당대 최고의 라이벌이었던 에디슨을 확실하게 제키고 군수분야 최고의 발명가로 등극하는 순간이자 그의 발명품, 맥심 기관총이 그 진가를 유감없이 발휘한 순간이었다. 그 날의 전투 내용을 살펴보자.

 

 1898년 9월 2일 수단 옴부르만, 영국의 허버트 키츠너(Herbert Kitchener) 장군이 이끄는 8,000명의 영국군과 17,000명의 이집트 혼성군은 나일강을 뒤로 진지를 구축했다. 나일 강에는 다섯 척의 Gun boat(포함)를 띄워 진지 후방을 수비케하고, 진지 바로 앞에는 가시덤불로 장애물을 설치했다. 그리고 가시덤불 사이사이 히든카드였던 맥심 기관총을 배치해 집중적인 화망이 구성될 수 있도록 했다. 영국과 이집트, 혼성군은 한방에 수단의 주력을 꺽을 계획이었다.

 

 여기에 맞서 수단의 독립을 지켜내기위해 뭉친 다르비시 전사들(이슬람 수단병사들)은 기병 3,000을 포함해 도합 52,000에 달했다. 종교적 열정을 지니고 있던 그들의 전의는 하늘을 찔렀지만 창, 칼 그리고 간혹 전장식 소총등으로 무장한 다르비시의 화력은 그들의 전의만큼 강력하지 못했다. 지도자 칼리파는 전 병력을 다섯 부대로 나눠 주력은 언덕뒤에 매복시킨 채 전면에는 8,000명의 선발대만 노출시켰다. 화력은 열세였지만 수적으로 우세하고 전의가 높은 다르비시 전사들로 구성된 최 정예 병력이었던 지라, 칼리파는 야간이 아닌 아침 6시를 공격시간으로 정했다.

    

여순전투 당시의 맥심기관총 

 수단군의 집결을 감지한 영국군은 모든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맥심 기관총은 고결한 기독교 유럽 군대에 감히 맞선 이슬람 쓰레기들에게 교훈을 가르쳐주기 위해 완벽한 상태로 정비되어 있었다. 수단군은 동이 트자 마자 공격을 개시했다. 창과 소총으로 무장한 수단군 8,000명이 영국군 진지를 향해 맹렬히 돌격을 시작했고, 금세 그 수는 16,000명으로 불어났다. 영국군이 소총을 일제히 쏘아댄대도 충분히 울타리를 타고 넘어 진지를 유린할 수 있는 병력수였다.

 

윈스턴 처칠의 당시 회고를 빌리자면 몰려오는 다르비시 전사들을 보는 영국군들은

     축제를 기다리는 아이들처럼 들떠 있었다고 한다. 맥심 기관총의 위력을 알고있던 그들에겐 바야흐로 즐거운 학살이 시작되고 있었다. 다르비시 부대가 영국군 진지에 가까워지자 맥심 기관총들이 일제히 불을 뿜었다. 앞서 달리던 수단병사들이 우수수 쓰러졌다. 그들의 시신을 뛰어넘어 달리던 병사들도 맥심이 불을 뿜을 때마다 낙엽처럼 쓰러졌다. 시체는 계속 쌓여갔고 다르비시 전사들은 돌격을 멈추지 않았다. 

 

 불과 30분에 걸친 이 첫 교전에서 다르비시는 무려 4,000명이 사망했다. 상상을 초월하는 피해였다. 죽을 힘을 다해 돌격했지만 맥심 기관총의 가공할 위력앞에서 어느 누구도 영국군 진지 50m 이상 가까이 다가갈 수 없었다. 후퇴를 몰랐던 그들은 기관총의 화망과 포격의 화망 사이에 갇혀 숨져갔다. 사망자의 상당수가 기도하는 자세로, 머리맡에 신발을 정리한 채로 숨져있었다는 것은 그들이 그 자리에서 어떤 상황에 처했던 지를 짐작케하는 대목이다.

 

 첫 공격을 철저하게 분쇄한 키츠너 장군은 전 군에 진격을 명령했다. 400명의 기병대를 필두로 강력한 화기를 앞세운 영국군은 다르비시 주력 3만과 격돌했고 파상공세를 계속했던 수단군은 완벽하게 궤멸당했다. 애초부터 상대가 않되는 전투였던 셈이다. 이 전투로 수단군은 10,000명이 사망하고 13,000명이 부상을 당했으며 5,000명이 포로로 잡혔다. 영국군은 47명이 사망하고 382명이 부상을 당했다. 종합 전적28,000명 대 529명, 영국군의 완벽한 승리였다.

 

 수단의 칼리파는 살아남은 잔여 병력 24,000명과 함께 후퇴해서 후일을 도모했지만 그 다음 전투에서도 속절없이 패배하고 그 자신도 전투중 사망했다. 옴두르만 전투의 결과, 영국군은 수단을 집어 삼켰고 그 가치를 입증한 맥심 기관총은 유럽 열강들에게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2차 대전의 영웅, 처칠은 자신이 쓴 책 <강의 전쟁 : 수단 정복>에서 옴두르만 전투를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옴두르만의 전투는 끝났다. 야만인을 상대로 한 현대문명의 가장 위대한 승리였다. 불과 다섯 시간 만에 가장 강력한 무장을 갖췄던 야만인 쓰레기들을 위대한 유럽 군대의 힘으로 쓸어버렸다. 개뿔 힘들지도, 위험하지도 않았다. 우리의 피해는 미미했다" 수단은 그렇게 영국의 식민지가 되어 1956년 독립할 때까지 영국의 지배를 받았다.

 

아마 조선을 침탈한 제국주의 세력이 일본이 아닌 영국이었고, 윈스턴 처칠이 옴두르만이 아닌 우금치에 있었다면... 저 말속의 야만인 쓰레기들은 한국인을 의미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들에게 피 식민지 사람들은 쓰레기였고 야만인이었다. 그래서 학살을 해도 죄책감이 없었고, 자신들의 지배가 정당했다.

 

 옴두르만 전투는 위대한 전투가 아닌 끔찍한 학살이었다. 그리고 그 학살의 최대 공신은 맥심 기관총이었다. 맥심은 제국주의 국가들이 선호하는 식민지 공격의 첨병이 되어 전 세계로 팔려나갔고 두 차례의 세계 대전을 거치면서 비약적인 개량을 거듭했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기관총이 발명되기 전까지의 전쟁 사망자 숫자보다 1,2차 세계대전과 식민지배를 거치면서 기관총에 희생된 사람들의 숫자가 더 많지 않을까하는 생각도 든다.

 

기관총의 위력

 

 맥심 기관총의 전신인 개틀링 기관총이 사실은 전쟁을 빨리 끝내서 그 희생자를 줄여보자는 의도로 개발된 것이지만, 그 이후 기관총 덕에 대량 학살의 역사, 침략의 역사가 펼쳐졌다는 점을 감안해보면 결국 역사는 인간의 탐욕에 의해 더 잔인하게 발전할 수밖에 없는 것 같다.

 

 하지만 그러한 와중에도 맥심 기관총의 위력을 여실히 보여준 사례들이 속속 등장하였다. 1893년 짐바브웨에서 원주민의 항거가 벌어졌는데 4정의 맥심 기관총을 보유한 불과 50여 명의 경비대가 무려 4천여 명의 원주민의 공격을 막아내었다. 한마디로 학살이었고 이것은 제1차 대전의 비극을 예고하는 전주곡이었다. 특히 정규전이었던 1905년 러일전쟁 당시에 1정의 러시아군 맥심 기관총에 일본군 1개 대대가 도륙되기도 하였다.

 

 러일전쟁의 여순 전투에서 공격하는 일본군을 도륙한 러시아군의 사진. 이 전투는 맥심 기관총의 위력을 여실히 보여줬다.

 일본이 결국 전투에서 이기기는 했으나, 일본군의 인명피해는 러시아 군보다 훨씬 컸다.

피아 모두가 채택한 기관총

 

 동시기에 맥심 기관총의 효용성을 깨달은 여러 나라들이 라이선스 제작에 들어갔는데 그 중 가장 앞장섰던 나라가 독일이었다. MG08 스팬다우(Spandau)라 명명된 독일형 맥심 기관총은 높낮이 조절이 가능한 썰매모양의 거치대등을 장착하는 식으로 일부 개조가 이루어졌지만 기본적인 사양은 동일하였다. 그 결과 1914년 제1차 대전 발발 당시에 독일은 총 10만정의 맥심 기관총을 장비한 최대 보유국이 되었다.

 

 또 하나의 군사대국인 러시아군도 같은 방식으로 맥심 기관총을 라이선스 생산하였다. 러시아용은 별도의 제식 소총탄을 사용할 수 있도록 약실이 개조되었고 이런 저런 사양 개조로 가장 무거웠던 맥심 기관총으로 불렸는데 이것이 PM M1905기관총이다. 제1차 대전 당시에는 이를 좀 더 개량한 PM M1910이 대량 사용되었는데 이후 한국전쟁 당시에 북한군에 공급되어 우리와 악연이 있다.

 

 맥심의 모국이기도 했던 영국도 애용하였지만 제1차 대전 직전에 보병대대당 2정만 배치하였던 점을 고려한다면 경쟁국에 비해 홀대를 받았다고 할 수도 있다. 영국군이 제식화한 모델은 맥심 기관총의 가장 큰 단점인 무게를 반 정도로 대폭 줄인 비커스(Vickers)기관총이었다. 현대식 기관총과 비교한다면 이것 또한 무거운 수준이었지만 그래도 여타 국가의 맥심 기관총과 비교한다면 훨씬 다루기 용이하였다.

 

맥심 기관총이 지배한 죽음의 경쟁

 1914년 인류는 지금까지 경험해 보지 못한 지옥을 현실에 만들어 내었다. 제1차 대전 당시 서부전선의 희생이 그토록 컸던 점은 무기의 발달에 비해 전쟁을 지휘하는 이들의 생각이 너무 고루하였기 때문이었다. 한마디로 나폴레옹 시대의 공격 제일 사고에서 벗어나 있지 못하였던 것이었다. 돌격명령을 받고 적진을 향해 뛰쳐나간 병사들이 상대편 참호에서 날아오는 총탄에 속수무책 당하는 것이 전선의 일상이 되어버린 것이었다.

 

 오늘날 같으면 기갑장비를 이용하여 참호선을 돌파하는 작전을 펼치겠지만 당시만 해도 포격 후 보병이 돌격하는 방식 외에 마땅히 구사할 전술이 없었다. 그렇지만 아무리 포탄의 비를 퍼부어도 상대를 완전히 제거하지 못하였고 이렇게 살아남은 방어자들은 포연을 헤치고 돌격하는 공격자가 사거리 안으로 들어오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이름이 조금씩 다를 뿐인 맥심 기관총에 의해서 무명의 병사들은 하염없이 숨져갔다.

 

 참호를 파고 전선이 고착화되자 맥심 기관총의 위력이 여지없이 드러났다. 너무 무거워 공격 시에는 재빠르게 옮겨 다니며 지원할 수 없었지만 진지를 구축하고 방어에 나섰을 때는 다가오는 적을 향해 무자비하게 총알을 퍼부어대는데 적격이었던 것이었다. 당연히 엄청난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이렇게 참호전과 더불어 맥심 기관총은 제1차 세계 대전의 학살을 뜻하는 대명사로 바뀌어 갔다. 바로 죽음의 경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