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이되고 피가되고

"당나라 군대" 왜 당나라 군대인가?

거제관광개발공사 2014. 7. 24. 16:41

 당나라 군대

 

  흔히 사람들은 군기가 빠지고 연전연패하는 오합지졸의 군대를 ‘당나라 군대’라고 일컫는다.

  당나라 군대라는 말은 옛날에는 없었는데 언제부터인가 군대에서 “니들이 당나라 군대냐?”라는 말이 나왔는데 이 말이 왜 어디서 나왔는지는 구체적으로 알려져 있지 않다.

 

  한 가지 설이 있는데 청일전쟁 당시 일본군이 청나라 군대를 격퇴한 후 청나라 군대의 전투력이 형편없으며 저들이 진짜 군인이 맞느냐는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청나라군은 군복은 입었으나 군대 같지도 않은 가짜군대라는 생각을 하게 됐고, 일본어로 가라(가짜)와 당나라를 뜻하는 가라(일본어로 唐을 가라라고 발음한다)가 맞물려 당나라 군대가 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이 설이 확실한 것은 아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역사적으로 당나라 군대는 진짜 말 그대로 ‘당나라 군대’였다.

 

  일반적으로 당나라 군대는 7~10세기 초까지 동아시아 최강의 군대를 보유한 강국이라고 말하는데 이는 당나라에 대한 모독(?)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당나라 역사 300년 중 군사력이 강했던 시기는 불과 40년 정도 밖에 안 되기 때문이다.(630년부터 당 고종이 다스리던 670년까지)

 

 ✰당나라군의 계속되는 굴욕

 

  1. 돌궐에게 조공

  처음 당 고조 이연이 당나라를 세울 때 당나라는 강한 국가가 아니었다.

  고구려에 대패한 수나라는 국력이 엄청 소진되어 약해진 상태였는데 약화된 수나라를 바탕으로 고만고만한 군벌들끼리의 전쟁에서 이연이 수나라를 멸망시키고 당나라를 세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건국초기 당나라는 처음부터 북방의 강국 돌궐에게 굴욕을 당할 수밖에 없었는데 황제 이연은 돌궐의 시필 가한에게 자신을 신하로 지칭하며 조공을 바쳤다.

  아마 중국 역사상 전국하자마자 이민족에게 조공을 바친 나라는 한나라와 당나라밖에 없을 것이다.

 

  점차 돌궐은 거만해졌고, 이세민이 형제들을 죽이고 아버지 이연을 몰아낸 ‘현무문의 변’을 일으킨 것을 문제 삼고 장안성을 향해 군대를 몰고 왔다. 이에 이세민은 어쩔 수 없이 위수에서 수많은 금은보화를 바치고 굴욕적인 강화조약을 맺었다.

  이세민 스스로 ‘위수의 치욕’이라 말했고 돌궐에게 복수하고자 정예군대를 양성했다.

 

  보병 중심의 전술을 경기병 중심의 전술로 바꿔서 병사들을 훈련시켜 복수를 준비했다. 돌궐이 내부 분열로 나라가 혼란스러워지자 628년 주변국인 철륵과 설연타와 함께 군사동맹을 맺고 돌궐에 대한 포위망을 만들었다.

  내부분열로 약해진 돌궐을 630년에 당 태종은 이정과 이세적으로 하여금 돌궐 정벌에 나서게 했고 결국 힐리 가한이 포로가 되고 돌궐은 무너지고 말았다. 당나라는 이로 인해 동아시아 최강국이 되었던 시기였다.

 

  2. 고구려에 당한 패전

  돌궐에 대한 복수를 완료한 이세민은 고구려에 눈을 돌렸고, 645년에 30만 대군으로 고구려를 침공하지만 안시성에서 양만춘의 군대에게 대패하고 고구려 정벌을 단념하고 말았다.

  이세민이 죽고 그의 아홉 번째 아들 당 고종은 신라와 함께 660년 백제를 멸망시키고 그 여세를 몰아 고구려를 침공하지만 662년에 사수에서 고구려 군에게 대패하고 당나라 장수 방효태와 13명의 아들, 그리고 4만 대군은 전멸하고 말았다.

  그래도 당 고종은 고구려 원정을 포기하지 않았는데 이때 고구려에서 내분이 발생했다. 연개소문 사후 그의 아들들은 서로 권력다툼을 하는 동안 고구려 국력은 약해졌고 첫째 연남생은 당나라로 망명 와 668년에 고구려를 멸망시키는데 일조했다.

 

  당나라 군대가 성공한 돌궐, 백제, 고구려 정벌을 보면 당나라 스스로의 힘으로 정벌했다기보다는 주변국과 연합전선을 펼쳤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고 그들 나라들이 망국의 길로 갔던 가장 큰 이유는 지배층의 분열 때문이었다.(외부의 적보다 내부의 적이 더 무섭다는 것을 여실히 증명한 것이다)

  돌궐부터 백제, 고구려를 멸망시킨 당나라는 668년 이후로 계속되는 굴욕을 당하고 국력이 약해지기 시작했다.

668년 이후 당나라 군대는 말 그대로 ‘당나라 군대’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3. 토번과 신라에게 굴욕당한 당나라군

  당나라가 고구려 원정에 눈을 돌린 사이 토번은 명재상 기르퉁첸의 정책으로 국력이 강성해졌고 그가 죽고 난 후 정권을 물러 받은 희대의 명장인 기르퉁첸의 아들 기르친링은 669년 9월 당나라와 정면 대결을 하고자 당나라가 차지하고 있던 서역의 천산남로(天山南路)를 급습했다. 당시 천산남로는 당나라에 있어서 중앙아시아와 통하는 무역의 거점이자 길목이었던 아주 중요한 교통로였다.

  천산남로를 기습당한 당나라 측천무후는(당시 고종은 신병으로 나라를 다스리지 못해 황후가 대리청정하고 있었다) 고당전쟁에 참가했던 장수들을 끌어 모아 토번 토벌전을 감행했다.

  주장 설인귀와 10만 대군은 대비천에서 가르친링의 토번군과 맞서 싸우지만 모두 전멸해 버리고 설인귀는 포로로 잡히고 말았다. 기르친링은 설인귀를 죽이지 않고 다시는 침략하지 말라고 훈계하고 당나라로 돌려보냈고 설인귀는 패전의 책임을 지고 관직에서 쫓겨나 평민이 되었다.

 

  이때 신라는 당나라의 동향을 예의주시하고 있었고 당나라에 있는 첩자들을 통해 당나라가 토번과 전쟁 중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결국 신라는 당나라가 차지한 영토를 수복하기 위해 당나라의 도독이 차지하고 있는 지역들을 선제공격했고, 당나라군을 격퇴했다.

  당나라는 토번과 신라 양대 전선으로 병력을 차출할 수밖에 없었고 당나라는 이 양쪽 전선에서 모두 패하고 말았다.(아무리 군사강국이라도 혼자서 둘로 갈라진 전선에서는 결코 이길 수 없다. 나폴레옹과 히틀러가 이 논리를 증명하였다)

  676년 매소성 전투에서 김원술(원술랑, 김유신 둘째 아들)은 3만의 병력을 이끌고 이근행의 20만 당나라군을 괴멸시켰고, 토번 전선 승풍령에서 기르친링은 이경현의 18만 당나라군을 전멸시켰다.

이때 이경현은 백제 유민출신 흑치상지의 도움으로 겨우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4. 토번에게 또 털리고 거란과 고구려 유민에게 털리는 당나라

  689년 당나라 측천무후는 위대기와 염온고에게 10만 병력을 주어 눈에 가시 같았던 토번을 다시 정벌하고자 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가르친링에게 안식가강에서 10만 당나라군은 괴멸하고 말았다.

  계속되는 토번전선의 패전에도 당나라는 다시 서역을 차지하겠다는 의지를 가고 692년에 왕효걸을 좌무위대장군으로 복직시켜 당나라에 있던 돌궐 용병과 더불어 정예부대인 금아군 30만을 내주어 안서사진(安西四鎭)으로 진격하였다. 이에 맞서 가르친링의 동생 가르다고리가 15만을 이끌고 대적했지만 패전했고, 재상으로 승진했던 가르친링은 서돌궐에게 도움을 청해 10만 돌궐 원군이 당나라군을 공격했지만 왕효걸에게 대패하고 말았다.

  결국 토번은 안서사진을 상실했고 위기에 빠졌지만 이때 거란족의 독립운동이 일어났다.

    

  696년 이진충이 영주도독 조문회를 죽이고 처남 손만영과 당나라에 반기를 들었는데 당시 거란은 당과 비교했을 때 원시적이고 군사력도 그렇게 강하지 못한 변방의 작은 부족에 불과했다. 하지만 거락의 전투력은 당나라를 뛰어 넘고 있었다.

  이진충과 손만영의 거란군은 하북으로 진격해 당나라군과 백성들을 학살했고 당의 장군 조인사는 휘하 28명의 장수들과 병력을 거느리고 거란을 공격했으나 전멸 당하고 조인사는 포로가 되었다.

  이에 당나라는 왕효걸, 소광휘가 17만 대군을 이끌고 거란을 공격하였으나 거란군은 동협석의 낭떠러지로 당나라군을 유인했고, 그곳에서 당나라군을 괴멸시켰다. 그 후 손만영은 유주를 차지하고 그곳 주민들을 학살했다.

당나라군은 다시 무의종과 누사덕을 지휘관으로 20만 진압군을 조직해 거란군과 맞서 싸우게 하지만 손만영의 군세에 눌려 싸워보지도 못하고 하남 쪽으로 후퇴하고 말았다.

  더 이상 당나라는 거란을 진압할 수 없어서 돌궐에게 막대한 재물을 주어 군사동맹을 맺었고 돌궐과 함께 거란족을 공격해서 겨우 진압할 수 있었다.

  거란족의 반란은 당나라의 지배권을 약화시켰고 그 틈을 타 대중상과 대조영 그리고 걸사비우의 통솔 아래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은 동쪽으로 이동했다.

  당나라는 이들을 토벌하고자 거란의 항장 이해고를 사령관으로 임명하고 20만의 군대를 편성해서 공격했지만 천문령에서 3만의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에게 대패하고 말았다. 대중상과 걸사비우는 이 전투에서 전사했지만 대조영은 남은 유민을 이끌고 고구려의 옛 땅으로 와서 발해를 세웠다.

 

  5. 토번에게 털리고 돌궐에게 굴욕 당했던 당나라군

  거란의 반란과 대조영의 통솔아래 고구려 유민들이 발해를 세웠던 698년, 당나라군은 670년부터 계속되는 패전으로 군사력을 엄청 소진한 관계로 형편없이 약화되고 말았다.

  토번의 명장 가르친링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다시 서역의 길목인 안서사진을 차지하기 위해 3만의 기습군을 편성하여 당의 임조를 공격했다. 당나라는 거란전에서 패했지만 토번전에 전공이 있었던 왕효걸을 총사령관에 임명하고 다시 돌궐 번국군과 금어군 30만명을 내주어 다시 토번을 공격했다.

 

  692년에 가르친링의 아우 가르다고리의 패전으로 15만 대군을 상실했기 때문에 가르친링이 끌어 모을 수 있는 병력은 불과 5만 정도에 불과했다. 병력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토번군은 당나라군에 밀리지 않고 끈질기게 저항했는데 측천무후는 토번을 완전히 지도상에서 사라지게 할 목적으로 누사덕을 지원군 사령관으로 임명하고 10만의 원군을 파견했다.

  699년 3월 토번군 5만과 당나라군 40만은 소라한산에서 격전을 벌였는데 가르친링의 뛰어난 전략전술로 40만의 당나라군은 전멸에 이르는 대패를 당하고 말았다.

 

  소라한산의 패전으로 당나라는 완전 이빨 빠진 호랑이 꼴이 되었고, 그 이후로는 토번에게 굴욕적인 외교로 나갈 수밖에 없게 되었다.

  710년 무측천을 몰아내고 반정에 성공한 당 중종은 토번에게 문성공주를 진공으로 바치는 외교적 굴욕을 당했고 711년 당 예종은 토번에게 하서구곡의 땅을 할양하는 굴욕도 당했다.

  하서의 구곡지방은 당나라 입장에서 서역으로 가는 교통로였고, 군사적 요충지였지만 토번에게 빼앗겼고 토번은 심심하면 당나라 국경지역을 제집인양 넘나들며 약탈했다.

  무측천 시대의 후기에는 돌궐이 다시 부흥했고 돌궐군은 조, 정지역을 침공하여 10만에 달하는 백성을 살해하고 약탈과 강간을 일삼아도 이 때 당나라 군대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겁에 질려 반격의 엄두를 내지 못했다.

  당 중종시절에는 돌궐군이 명사지역을 공격해서 수만의 당군을 전멸시키기도 했다.

 

  6. 연전연패하는 당나라군

  당나라군의 굴욕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당 현종은 남만의 오랑캐를 평정한다는 명목으로 두 번의 정벌군을 파견해서 공격했지만 1차에서 6만이 죽고, 2차 원정에서는 7만의 당군이 죽는 대참패를 당했다. 원래 한족은 북방민족에 약하고 남방민족에는 강한 면모를 보였지만 두 차례 원정의 패전으로 무능력한 당나라의 모습을 그대로 보이고 말았다.

  그리고 괜히 발해를 건드렸다가 발해의 군세에 눌려 싸워보지도 못하고 후퇴했고 안녹산의 난으로 인해 당나라는 돌이킬 수 없는 쇠퇴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당나라는 안녹산의 난을 진압할 능력이 없어 결국 위구르에게 도움을 청해 겨우 진압하게 되었다.

 

  이때 위구르는 당의 원군으로 당나라에 들어 왔지만 이들은 주둔지에서 살인과 약탈을 일삼았는데 당나라는 이들을 통제할 힘이 없었다. 반란 진압 중에 위구르는 당나라에 참전 대가를 요구했는데 당은 매년 건포 2만 필을 내주고 영국공주를 위구르 칸에게 첩으로 내주게 된다.(송나라도 저리 가라할 정도로 당나라는 이민족에게 굴욕을 당한 것이다)

 

  위구르의 도움으로 겨우 반란을 진압했지만 이때를 틈타 토번의 대군이 다시 침공하였다.

  토번군은 763년 10월 당나라의 수도 장안성을 점령했고, 이때 당나라 황제 대종은 섬주로 도망가는 추태를 보였다. 장안을 점령한 토번은 당의 왕족 이승광을 꼭두각시 황제로 앉혀 괴뢰정부를 수립했고, 농우지역 등의 넓은 지역을 차지했다. 토번의 대침공으로 인해 당나라 백성 100만 명이 토번의 노예가 된 것이다.

 굴욕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783년 토번은 당나라에게 자신들이 점령한 지역을 토번의 영토로 인정하라는 강제조약을 맺자고 강요했다. 이 조약을 ‘당번청수맹약’이라고 하는데 이 조약으로 다시는 당나라가 영토를 수복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토번에게 약소국 취급을 당한 당나라보다 토번이 먼저 멸망했다.(토번은 당나라에 멸망당한 게 아니라 내분과 농민반란으로 8개 부족으로 쪼개지면서 멸망했다)

 

  이뿐 아니라 이후에도 당나라의 굴욕은 계속된다.

  토번에게 굴욕을 당했던 당나라는 831년 남만의 침공을 받아 성도가 함락 당했고, 성도에 있던 기술자, 도공 등 수 만 명이 남만군에게 잡혀가는 수모를 당했다. 이때 당나라군은 그저 바라만 보고 있었다.

 

  875년에는 황소의 난이 일어났는데 5년 동안 당나라군은 무장상태가 아주 빈약했던 농민 반란군에게 모두 격파 당했고 장안까지 점령을 당했다. 이때 당 희종은 사천성으로 도주했고 소금장수 출신의 반란군 두목 황소는 국호를 대제(大齊)라고 칭하고 황제 노릇을 5년 정도 해먹기도 했다.

  당나라는 이들을 제압할 힘이 없어서 결국 죄를 짓고 피신 중이었던 용장 이극용의 죄를 용서해주고 절도사 관직을 주면서 회유했다. 절도사 관직을 받은 이극용은 사타족 병사들을 이끌고 반란군을 장안에서 축출하고 반란을 진압하였다.(이극용은 순수 한족이 아닌 돌궐과 한족의 혼혈인이며 독안룡이라는 고사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하지만 황소의 난을 계기로 당나라는 사실상 몰락하였고 권력을 쥔 절도사들이 서로 패권을 차지하기 위해 나라를 세우고 대립하는 시대가 오게 된다.

  흔히 송나라가 중국 역사상 가장 약체국이라고 하지만 당나라만큼 이민족들에게 가장 시달림을 받고 동네북 신세였던 왕조도 없었다.

 

  7. 당나라군은 말 그대로 ‘당나라 군대’였을까?

  수나라의 고구려 원정 실패와 군벌들의 혼란기를 거친 관계로 많은 인명이 살상 당했기 때문에 당나라 건국 초기에는 군사력이 약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건국 초기에는 돌궐국의 신하국이 되는 굴욕도 당했다.

  당 태종은 당나라는 보병 중심이라 기병 중심인 돌궐을 이기기 힘들다는 점을 알고 경기병 위주의 전술을 도입했고, 주변국들을 외교력을 통해 동맹국으로 만들고 정치적인 혼란기를 겪고 있던 돌궐을 쳐서 멸망시킬 수 있었다.

  그리고 수나라처럼 병농일치의 부병제를 통해 군사력을 증강시켰는데 이 부병제가 시간이 지날수록 군사력의 저하를 가져왔다.

 부병제란 국가에서 군전법을 시행해 농민들에게 토지를 균등하게 분배했고 토지를 받은 농민은 그 대가로 군역의 의무를 지는 것이 병농일치제도인데 평소에는 농업에 종사하다가 휴농기에는 농민들이 교대로 군대에 복무했고 국가로부터 토지를 대가로 받았기 때문에 군 생활에 들어가는 모든 비용의 몫은 농민들의 몫이었다.

즉 녹봉도 없고 군 장비 모두를 농민들 스스로 구입해서 군대 생활을 해야 했던 것이다.

  당나라의 입장에서는 국방비가 거의 들지 않았고, 고향과 가족을 지키기 위해 군복무를 하는 명분을 주었기에 군사력이 유지될 줄 알았었다.

  방어적인 관점에서는 부병제가 어느 정도 효과가 있을 수 있지만 단점은 원정을 나갈 때 군사력이 약해지는 것이 문제였다. 병사의 입장에서 보면 가족과 고향을 지키는 것이 아니고 이국만리 원정을 나가는 것이라 향수병이 생겼고, 애국심보다 두려움이 앞서서 사기가 떨어졌고 군기도 해이해 졌다. 결국 이런 사기저하는 전투 시 당나라군의 패배로 이어지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리고 원정 나갈 때 드는 비용도 모두 병사들 개인부담이었던 관계로 병사의 사기가 유지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당나라는 이러한 약점을 극복하고 군사력을 강화하고자 포로들이나 적대하고 있던 주변국들에서 망명을 오거나 출세하고 싶어서 당나라로 온 이민족들을 용병으로 고용했다.

  이들을 번국군(藩國軍)이라 불렀고 이민족 출신의 장수는 번장(藩將)이라고 불렀다.

  이민족 부대인 번국군은 태생이 용병인지라 당나라에 대한 충성도가 낮았으며 군기 또한 엄정하지 못했고 보상심리 때문에 변방이나 적지에서 민간인을 상대로 무자비한 약탈과 살인, 강간, 방화 등을 자행했다. 약탈과 강간은 번국군 뿐만 아니라 부병제로 동원된 한족 병사들 사이에서도 자행되었는데 그 이유는 원정 나갈 때 드는 비용을 자기 스스로 부담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번국군과 한족 군대는 언어소통의 문제도 있었고 한족 군대가 번국군을 이민족이라는 이유로 심하게 차별한 관계로 사사건건 부딪혔고 하극상도 만연했기 때문에 군기가 제대로 잡히지 않았다.

  이러한 내부 문제가 겹쳐진데다가 측천무후 시기 이후의 한족 출신 지휘관들은 실력으로 승진한 것이 아니라 고위층에 뇌물을 바쳐 직위를 구입한 지휘관이 많았기 때문에 지휘관으로서의 자질이 엉망이었다.

  이들은 전투에서 패전해도 예전부터 고위층에 뇌물을 써서 잘 보였었기 때문에(뇌물은 거의 약탈한 것으로 충당) 징계를 당하지도 않았고 줄이 좋은 장수는 패전해도 승진하기도 했다.

  지휘관들이 이렇게 엉망인데다가 병사들의 자질도 형편없고 번국군 또한 자기들의 뱃속만 채우려고 했으니 당나라 군대는 강할래야 강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지휘관이 저 모양이니 휘하 장수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한족 생활에 동화된 번장들도 못된 악습을 배워 그대로 활용했다.

 

  돌궐족과 이란계 소그드인의 혼혈아인 안녹산의 예를 들자면 안녹산은 번장으로 복무하면서도 딱히 전공을 세운 적이 없었다. 영주의 번장으로 복무하면서 무관의 본분인 이민족과의 전투보다는 해, 거란, 실위, 말갈 등의 이민족과 중계무역을 통해 돈을 벌었고 중앙에서 파견되어 온 감독관에게는 뇌물을 주어 자신의 실책을 덮었다.

  736년 이후에 독재적인 권력을 휘둘렀던 당시의 재상 이임보(李林甫)는 한족 출신의 군인들을 장수로 임명하는 것을 기피했는데, 그 이유는 이들이 세력을 얻게 되어 궁중 내에서 자신의 위치를 넘보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이 때문에 한족이 아닌 장수들도 절도사(節度使)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뇌물의 힘으로 안녹산은 당 현종을 알현할 기회를 얻었고 현종은 안녹산의 불룩한 배를 보고 “이 배에는 무엇이 들어 있는고?”라고 농을 던졌는데 안녹산은 “황제 폐하에 대한 충성심으로 가득 차 있사옵니다.”면서 아부를 떨었던 결과 현종의 신임과 절도사라는 직책을 얻게 되었다. 그리고 사실상 당나라의 실세였던 양옥환(양귀비)의 환심까지 사서 양귀비의 양자가 되었다.(양귀비보다 16살이나 많은 안녹산이 양귀비 양자가 된 것은 그만큼 아부가 뛰어났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일화이다)

 

  안녹산뿐만 아니라 당나라 절도사 대부분이 이러한 과정을 거쳐 절도사가 되었고 한족 출신이 아닌 번장 출신들로 채워져 군대가 잘 돌아갈 턱이 없었다.

  절도사는 사실상 그 지역의 왕이나 다름없는 권력을 누렸는데 안녹산의 난 이후 절도사의 권력은 더욱 강대해졌고 절도사들은 자신의 세력권 백성들에 대한 수탈과 약탈, 살인 등을 일삼았다.

  당시 당나라는 너무 약해져 있었기 때문에 중앙정부가 이들을 통제할 힘이 없었고 절도사는 말 그대로 그 지역의 왕처럼 군림했다. 절도사 밑의 병사들은 모병제로 채워졌는데 모병제란 국가가 평화로울 때는 효과가 있지 혼란기일 때의 모병제는 별 효과가 없었다.

  모병에 자원한 병사들은 대부분 부랑아나 건달 같은 자질이 좋지 못한 사람들로 채워졌기 때문에 수준이 형편없었다. “절도사 휘하의 병사들은 다 도적이다”라는 말까지 돌 정도로 당나라 군대는 한심하고 형편없는 군대로 전락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