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로수용소유적공원

포로수용소유적공원 소개

거제관광개발공사 2013. 11. 20. 15:18

거제 포로수용소 유적공원 소개

 

 

 

 

3년간에 걸친 6.25 전쟁으로 남·북한의 전국토가 폐허가 됐다. 기나긴 전쟁에서 유엔군과 한국군을 포함해 18만 명이 생명을 잃었고, 공산군 측에서는 북한군 52만 명, 중공군 90만 명의 병력이 잃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또 민간인 피해는 남북 모두 약 150만 명의 사망자와 360만 명의 부상자를 내고, 국토의 피폐화를 가져왔다.

거제도 포로수용소는 한국전쟁 당시 생포한 북한군 포로들을 수용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이곳은 육지와의 교통수단이 배 밖에 없었다. 유엔군이 1951년부터 고현리, 수월리 등지를 중심으로 수용소를 설치했다.

 

왜 이렇게 먼 남도까지 와서 수용소를 세웠을까?

 

한 전문가는 “한 명의 젊은이도 귀한 전시상황, 포로수용소의 관리로 젊은 인력이 쓰이는 것을 막기 위해 수도권과 떨어진 거제도가 선택됐다”는 것이다.

거제도 포로수용소에는 전쟁 당시의 생생한 기록들이 남아있다. 일요일 아침 급작스런 북한의 공격으로 계속 밀리던 우리군은 1950년 9월15일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전세를 역전시킨다. 이 때문에 많은 북측 포로가 생긴 이유다.

 

 

 

부산과 경북 등지에 분리 수용했던 포로들은 그 수가 너무 늘어나 수용에 어려움을 겪다보니 1950년 11월 거제도 고현, 수월, 양정지구를 중심으로 포로수용소가 설치됐다. 거제도 포로수용소는 인민군 15만 명, 여자 포로와 의용군 3000명 등 17만3000명을 수용했다. 섬 전체가 포로수용소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1953년 6월18일에 이승만 대통령이 반공 포로 2만7389명을 석방하고 1953년 7월27일 휴전협정 후 수용소는 폐쇄됐다. 포로수용소에는 당시 13만 명이 넘는 포로가 생활하고 있었다고 한다. 수용소 안에서는 북한으로의 송환을 거부하는 반공포로와 송환을 원하는 공산 포로 간에 대립이 자주 일어났고 1952년 발발한 포로수용소 폭동사건이 이 당시 상황을 살필 수 있다.

 

 

5월7일 오전, 낙동강 전선에서 미국 제1기병사단에 항복했던 이학구의 주도로 제76포로수용소의 공산 포로들은 순찰 중이던 수용소 소장 돗드 준장을 납치한다. 이들은 소장을 풀어주는 조건으로 포로들에 대한 처우 개선, 자유의사에 대한 포로송환방침 철회, 포로의 심사 중지, 포로의 대표위원단 인정 등을 주장했다. 영문도 모른 채 같은 민족에게 총부리를 겨누게 한 이념의 대립은 포로수용소에서도 계속 된 셈이다.

 

미군과 대립하던 포로들은 미군이 쏜 총에 맞아 70여 명이 죽고 140여 명이 부상당했다. 미군과 반공 포로, 공산 포로들이 맞부딪힌 가운데 포로 50여 명이 목숨을 잃기도 했다. 돗드 준장은 납치된 지 4일 만에 풀려났고, 6월10일 전 세계가 주목했던 폭동은 무력으로 진압되면서 끝이 났다.

거제도 포로수용소 유적은 1983년 12월20일 경상남도 문화재 제99호로 지정됐다

 일부 터만 남아있던 포로수용소의 유적지를 확장해 2005년 거제도 포로수용소 유적공원으로 탈바꿈하고 유적관도 세웠다. 유적관 전시실에는 포로의 생활사, 유품 등을 전시하고 있다. 영상실에도 당시 포로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이 밖에도 당시를 재현한 지휘본부의 막사, 78수용소, 야전병원, 취사장과 6.25 전쟁 때 사용한 헬기, 장갑차, 함포 등이 전시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