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천량해전공원

칠천량해전공원Ⅱ

거제관광개발공사 2013. 11. 26. 17:02

칠천량해전공원(Ⅱ)

 

3. 회한의 메아리

 

(1) 일본의 복수 준비

 

일본 수군은 이순신의 조선 수군과 싸우기만 하면 패배했습니다. 1592년 한 해 동안 이순신에게 격침당한 일본 수군의 전선은 300척이 넘었습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어쩔 수 없이 조선 수군과의 전투를 피하고 남해안 일대에 성을 쌓아 거점을 확보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로 인해 1593년의 남해안 일대에는 18개의 왜성이 축조되어 일본군의 거점 노릇을 하게 됩니다.

    

일본 수군이 싸움을 피하자 이순신도 군사를 움직이기 힘들어졌습니다. 이순신이 전투에서 늘 일본군을 이기긴 했지만 전력 자체만 놓고 보자면 늘 일본군보다 열세였습니다. 게다가 조선 수군은 전염병과 굶주림으로 고통이 심했습니다.

따라서 이순신은 일본군과의 싸움이 뜸해진 틈을 타 수군 재정비에 나섰습니다. 병력을 모집하고 무기와 전선을 더 만들었으며, 군사들과 백성들이 굶주리지 않도록 농사에 힘썼습니다. 이순신의 헌신적인 노력 덕분에 1596년 말에 이르면 조선 수군은 180여 척에 이르는 대선단으로 발전합니다.

 

 

 

조선 수군과의 큰 전투가 벌어지지 않는 동안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일본 수군이 조선 수군에게 받은 피해를 복구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하였습니다. 육군 중 일부를 수군에 편입시키고 일본 각지에서 선원 징발을 강화했습니다. 조선 수군과의 싸움에서 많은 전선을 잃었기 때문에 일본 전국에서 배로 만들기에 적합한 나무가 있으면 바로 채벌하라는 명령을 내리기도 했습니다.

심지어는 선박 건조용 철을 확보하기 위해 대장장이에게 낫과 호미 외에는 철제품을 만들지 말라는 명령을 내릴 정도였다. 이와 같은 노력을 통해 일본 수군은 임진왜란 초기보다 훨씬 강화된 전투력을 보유하게 되었습니다.

    

(2) 요시라의 반간계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 제 1군 대장인 고니시 유키나가와 제 2군 대장 가토 기요마사는 매우 사이가 나빴습니다. 그들의 사이는 조선 조정과 명나라까지 알고 있을 정도였습니다. 고니시는 그러한 상황을 오히려 역이용하여 이순신을 제거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1597년 1월은 일본군이 다시 조선을 침공해 정유재란이 발발하는 때였습니다. 일본에 있던 가토도 다시 조선으로 건너오게 되었습니다. 1월 11일 고니시는 자신의 부하 요시라를 통해 조선 조정에게 조선 수군을 시켜 가토를 공격하라고 권유했습니다. 이 권유는 1월 19일에 조선 조정에 도착하여 조선 조정은 이순신에게 가토 공격을 명령하는데, 가토는 이미 1월 12일에 부산에 도착한 상태였습니다.

 

(3) 이순신을 제거하려는 선조

 

조선 조정은 요시라의 보고를 곧이곧대로 믿지는 않았습니다. 고니시와 가토의 사이가 나쁘다고는 하지만 고니시 역시 조선의 적이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1월 21일에는 가토의 부산 상륙이 조선 조정에 알려집니다. 따라서 요시라의 반간계는 그냥 해프닝으로 끝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조선 국왕인 선조가 갑자기 이순신을 비난하기 시작했습니다. 가토를 잡을 수 있었는데도 싸우기 싫어 나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선조가 이순신을 비난하자 신하들이 맞장구를 치기 시작하여, 결국 이순신은 2월 6일에 삼도수군통제사직에서 파직되고 2월 26일에 한산도의 통제영에서 한양으로 잡혀오게 되었습니다. 이순신의 후임에는 원균이 임명되었습니다.

 

 

하지만 이순신은 조정의 명령대로 2월 중순에는 조선 육군과 합세하여 일본군의 본거지인 부산으로 나아가 무력시위를 벌였었습니다. 부산까지 나아가서 조선 수군의 위엄을 보인 이순신은 싸우기 싫어 출동하지 않았다는 터무니없는 죄목으로 잡혀오게 되었습니다. 요시라의 반간계가 성공한 것입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선조는 이순신을 제거하기 위해 요시라의 반간계를 알고서도 속아준 것입니다.

 

(4) 선조와 원균

 

선조는 자신의 왕권을 강화하는 일에 매우 집착했으며, 자신의 왕권을 위해서라면 잔인한 짓도 서슴지 않고 저질렀습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인 1589년에 정여립 모반의혹사건이 벌어져 1000여명이 넘는 사람들이 목숨을 잃은 적이 있었는데, (기축옥사) 이 사람들을 죽이는 일에 가장 앞장선 사람은 바로 선조 자신이었습니다.

그런 선조에게 임진왜란은 자신의 체면을 크게 손상시킨 일이었습니다.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려고 하자 조선 조정은 나름대로 만반의 준비를 했습니다. 특히 경상도 일대의 여러 성들은 아예 새로 쌓기까지 했습니다. 종 6품의 정읍현감이었던 이순신이 정 3품의 전라좌수사로 파격 승진한 것도 전쟁준비 중 하나였습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육지에서 패배가 연이어져 전쟁준비의 허점이 드러났고, 수도인 한양은 전쟁 발발 20여일 만에 함락되었습니다. 압록강변 의주까지 달아난 선조는 한때 명나라로 도망갈 생각까지 했습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이순신은 많은 조선군 장수들이 도망가는 와중에서도 소수의 조선 수군을 이끌고 일본 수군을 맞아 연전연승을 거두었으며, 포로가 되었던 백성들을 구출하고 농사를 지어 먹을 것을 마련하는 등 문무 양쪽에서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여 백성들의 존경을 받았습니다. 선조는 그러한 이순신에게 열등감과 질투심을 느끼기 시작했고, 이순신과 사이가 좋지 않은 원균을 노골적으로 편애하여 이순신을 견제했습니다.

 

원균은 경상우수사로 재직하던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싸울 생각은 하지 않고 휘하의 전선 70여 척을 불태운 뒤 경상우수영 소속 수군 1만여 명을 해산시켜 버립니다. 그리고 육지로 도망가려다가 부하장수인 옥포만호 이운룡이 어째서 싸우지도 않고 도망가느냐고 가로막는 바람에 이순신에게 도움을 청하여 함께 싸우게 되었습니다. 원균은 휘하 전선을 거의 다 불태웠기 때문에 겨우 4척만을 거느리고 이순신의 함대에 합류하였으며, 이후 1595년 2월에 충청병사로 옮길 때까지 이순신과 함께 싸우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순신과 원균의 사이는 매우 좋지 않았습니다. 앞서 말했듯이 원균은 병사와 전선을 버리고 도망가려 했으며, 이순신 덕분에 안전한 상황에서 싸우게 되었을 때에는 적의 목을 잘라서 자기 전공을 알리는 일에만 급급하였습니다.

심지어는 조선 피난민의 목을 자른 뒤 일본군의 목을 베었다고 거짓 보고를 올리는 식으로 자기 전공을 조작하기도 하였습니다. 이순신은 그런 원균을 경멸했습니다. 반면 원균은 나이와 경력이 자신보다 아래인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까지 승진하여 자신의 상급자가 되었다는 사실을 질투하였습니다. 원균이 충청병사로 옮겨진 것도 이순신과의 안 좋은 사이 때문이었습니다. 이런 원균이 이순신을 대신하여 삼도수군통제사까지 승진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이순신에 대한 선조의 질투 때문이었습니다.

    

(5)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원균

 

원균은 삼도수군통제사가 되기 전에 장계를 올려 수군이 단독으로 바다에 나아가 일본군을 제압해야 한다고 주장했었습니다. 당시는 이순신이 일본군과 대치 상황을 벌이고 있을 때였다. 조정에서는 이순신에게 나가 싸우라고 독촉하였으나 이순신은 적은 숫자의 군사를 가지고 함부로 공격을 펴는 것은 위험하다는 생각에 신중을 기하고 있던 때였습니다.

선조에게는 원균의 장계가 이순신을 제거할 좋은 구실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순신을 몰아내고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원균에게는, 수군을 이끌고 나아가 일본군을 제압해야 한다는 자신의 주장을 실천해야 할 의무가 생겼습니다.

    

하지만 원균은 금세 태도를 바꿉니다. 이순신의 신중한 태도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던 것입니다. 조선 수군 단독으로 일본군을 제압하는 것은 무리였습니다. 게다가 원균의 지휘능력은 이순신보다 훨씬 못 미쳤습니다. 3월의 기문포 전투에서는 숫자가 적은 일본군을 놓아 보내는 척 하면서 뒤를 기습했으나 오히려 일본군의 역습을 받아 판옥선 1척을 잃을 정도였습니다.

 

결국 원균은 조선 육군 30만 명을 동원하여 앞세우고 수군이 그 뒤를 따라 진격하자는 제안을 합니다. 전혀 실현 가능성이 없는 제안이었고 앞서 자신이 했던 주장과도 모순이었습니다. 선조는 이순신에게 그랬던 것처럼 원균에게 빨리 나가 싸울 것을 독촉하였습니다. 그래야 이순신을 파직했던 자신의 행동이 정당화되기 때문입니다.

원균은 어쩔 수 없이 나아가긴 했으나 싸울 능력도 의지도 없어서 전투력만 소모시켰습니다. 6월의 안골포-가덕도 전투에서는 일본군의 전선 2척을 빼앗았지만 다시 역습을 받아 조선 장수 중에 전사자가 나오고 말았습니다. 7월 초의 웅천-부산포 전투에서는 일본군 전선 10척을 격침시켰지만 풍랑 때문에 판옥선 12척을 잃고, 부산포 앞에서의 전투에서는 일본군에 의해 판옥선 20척을 잃어버립니다.

    

원균이 싸울 의욕을 가지지 않자 도원수 권율은 선조의 명령을 듣지 않는 원균에게 선조를 대신하여 곤장까지 쳐서 나가 싸울 것을 독촉했습니다. 결국 원균은 거의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조선 수군을 이끌고 바다로 나아갔으며, 칠천량의 패전은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