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천량해전공원

칠천량해전공원Ⅲ

거제관광개발공사 2013. 11. 26. 17:08

칠천량해전공원(Ⅲ)

 

 

 

4. 아픔의 메아리

 

7월 11일에 권율에게 곤장을 맞은 원균은 3일 후인 7월 14일 조선 수군을 이끌고 부산으로 나아갔습니다. 하지만 별다른 전과를 거두지 못하고 오히려 가덕도에서는 일본군의 매복에 걸려 조선 수군 400여명을 포로로 잃습니다. 원균은 포로가 된 조선군을 구할 생각 없이 도망갔으며 자포자기의 상태로 술에 취해버렸습니다.

 

 

조선 수군은 7월 15일 칠천도에 도착하여 머물렀습니다. 그날 밤 소수의 일본전함이 경계태세를 갖추지 않은 조선 수군을 습격하여 불을 지릅니다. 이 과정에서 판옥선 4척이 불타 버렸습니다. 조선 수군은 혼란스러운 와중에서도 사태를 수습하고 적을 맞아 싸우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7월 16일 새벽. 도도 다카도라, 와키자카 야스하루 등이 이끄는 일본함대 주력이 대규모로 몰려와서 조선 수군을 포위했습니다. 근처의 육지에는 고니시 유키나가 등이 이끄는 일본 육군이 조선 수군을 노리고 있었습니다. 원균은 싸울 생각도 하지 않고 고성 춘원포로 도망갔습니다. 조선 수군도 사령관인 원균을 따라 이유도 모르는 상태에서 고성으로 향했습니다. 하지만 전라우수사 이억기와 충청수사 최호 등은 물러서지 않고 끝까지 싸우다가 장렬하게 전사합니다.

    

춘원포에 도착한 조선 수군은 육지에 상륙한 뒤 대부분 달아났습니다. 나머지 조선 수군의 판옥선 대부분은 모두 불에 탔습니다. 상륙하여 달아나던 조선군 중 상당수가 미리 육지에서 대기하고 있던 일본군에게 죽임을 당했지만, 순천부사 우치적을 비롯한 나머지는 살아서 도망갈 수 있었습니다. 보통 원균이 이때 전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 전투 이후에도 살아있는 원균을 목격한 사람이 있어서 정말로 이때 전사한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경상우수사 배설 등이 지휘하던 판옥선 12척과 그 외 여러 배들은 간신히 바다로 도망가는데 성공했습니다. 배설은 한산도의 통제영으로 도망친 뒤 군사시설, 전함 및 양곡·군기와 군용자재를 적에게 빼앗기지 않기 위해 모조리 불태웠으며 남아 있던 백성들을 피난시켰습니다. 이로써 이순신이 헌신적으로 일구어낸 조선 수군은 눈 깜짝할 사이에 전멸에 가까운 패배를 당했습니다.

 

 

 

5. 부활의 메아리

 

칠천량에서 이긴 일본군의 첫 번째 공격 목표는 전라도였습니다. 전라도의 수군과 의병은 경상도의 일본군 근거지를 임진왜란 내내 위협했습니다. 일본군이 평양까지 진격하고서도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한 것은 그 때문이었습니다. 권율이 지휘했던 행주대첩의 조선군 역시 전라도 육군이었습니다. 따라서 일본군은 전라도를 침략하여 후방에 대한 위협을 제거한 뒤에 조선을 모두 손에 넣을 계획을 세웠습니다.

    

칠천량 해전에서 조선 수군이 거의 전멸 당하자 일본군에게는 장애물이 거의 사라진 셈이었습니다. 일본 육군과 수군이 나란히 전라도로 진격하였습니다. 8월에는 남원과 전주가 일본군에게 함락되었고, 일본군은 다음 목표인 충청도로 향했습니다. 수도인 한양이 다시 위험해졌다. 다행히 9월의 직산 전투에서 일본 육군이 조선·명 연합군에게 패배하였고, 결정적으로 같은 달 16일의 명량해전에서 다시 삼도수군통제사에 임명된 이순신이 13척의 판옥선만으로 133척의 일본 수군을 격파하였습니다. 이후 일본군은 다시 수세에 몰리게 되고, 결국 1598년에 조선에서 철수하면서 임진왜란의 막이 내립니다.